[사찰] 법주사(속리산)

2018. 8. 20. 16:56지구별여행이야기/사찰.성당.문화재

20180820



속리산 법주사 가는길에 숲길에서

사슴벌레를 만났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 위험하게 있어서 나무에 옮겨주었습니다.




속리산 법주사 가는길에 커다란 소나무도 볼 수 있습니다.




길 옆에 휘어진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웅장한 모습의 소나무 입니다.

속리산 초입의 정이품송에 비하지는 못해도, 법주사 가는길에서 만나게 되는 이 소나무는

볼때마다 기운을 주는 것 같습니다.


법주사를 들어가는 길에는 소나무들이 많습니다.




일주문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법주사로 가는길은 차가 갈 수 있는 길과, 사람만 갈 수 있는 숲길이 있는데,

숲이 있는 곳에 와서 차가 가는 길 보다는 흙이 있는 숲길을 걷게 됩니다.





작은 계곡 넘어 법주사건물들이 보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문들은 문화재 건물이라기 보다 법주사에 속한 생활시설로 알고 있습니다.




법주사와 문장대로 갈라지는 길 쯤에 법주사 안내판이 있습니다.

법주사는 553년 의신조사가 서역에서 불경을 가져와 세운 사찰로

정유재란때 전소되었다가 조선인조2년에 사명대자, 벽암대사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증축,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

이라는 표현은,

법주사는 수많은 문화재들과 4계절의 변화에 따른 경치, 기암, 기석의 절경이나 크고 작은 사찰들이 곳곳에 있어 이 모든것의 통칭입니다.



보은 속리산은 문화재가 많고, 설명이 잘 되어 있어

보고 읽을 것이 많습니다.

그 내용들을 옮겨와서 남겨둡니다.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이 비는 1666년 현종7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규모는 높이 163cm, 너비 65cm이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서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있는데 내용은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쳤다. 이상히 여긴 태종이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되 동국(한국) 명산에 큰 거북이의 형상이 당나나를 향하고 있어

많은 당나라 재물을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거북 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사람을 파견하여 곳곳을 찾다가 마침내 속리산 수정보에 있는 돌거북을 발견하고 그 목을 자르고 돌거북 등 위에 10층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이 비석은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인 벽암대사(1575~1660)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 5년(1664) 5월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정두경이 지었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

커다란 암반위에 홈을 파서 세웠으며 규모는 높이 213cm, 폭 110cm, 두께 35cm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승이며 승병장인 벽암대사는 임진왜란 때에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인조 2년(1624)에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8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 3천명을 모은후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법주사 당간지주 입니다.

깃발을걸기도 했던 것으로 신성구역을 표시하는 역활도 했었는데,

역사속에서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습니다.




같이 갔던 친구들이 당간지주앞에 섰습니다.

이런것만 보아도 법주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보은 법주사 당간지주


당간이라 찰 또는 찰주라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을 사찰이라  말함은 절에 당간 즉, 찰이 셍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다.

한편,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목종 7년(1006)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 높이는 전체 약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 국가재정마련을 위한 당백전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 바 있었는데,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경) 이곳 철당간은 22m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으며, 1972년 다시 복우너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보은 법주사 석련지

국보 제64호


신라 성덕왕 19년(720)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95m, 둘레 6.65m 에 이르는 희귀한 석조조형물이다.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난간의 짧은기둥)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법주사 입구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커다란 바위들이 있습니다.







그 바위들의 한쪽에 부처님모습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보물 제216호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암벽에 새긴 불상)로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볼록 새겨진 이 여래 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 길고 큼직한 코,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 꽉 다문 두꺼운 입술 등은 길다란 귀, 삼도의 표현 등과 함께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넓은 어깨에 비해서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으로 처리한 조각수법에서도 나타난다.







보은 법주사 석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석조는 높이 1.3m, 길이 4.46m, 너비 2.4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쌀 80가마를 채울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바닥부터 윗부분에 이르기 까지 수직의 벽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의 벽체에는 아무런 무늬 장식이 없이 단조로운 형태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는 모를 깍아서 부드러운 느낌을 내고 있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쪽은 23cm, 짧은쪽은 34cm 두께를 조정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아랫부분에 11cm의 구멍이 있어 실제로 물을 담아두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모퉁이 부분 일부의 손상 흔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아직 주변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계단도 없는 상태입니다.






보은 법주사 능인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을 모신 곳으로 능인이란 부처님을 가리키는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널리 이로움을 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곳에서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또 좌우로는 각각 8구씩 도합 16나한상을 안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인조2년(1624)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목조와가 이며 건평은 약 8.9평이다.









능인전 뒤뜰에 있는 세존사리탑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이 사리탑은 1362년 공민왕이 흥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중 법주사에 행차하여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1기를 법주사로 옮겨와 봉납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전한다.

이 탑은 8각을 기본 형태로 하여, 상.중.하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기단부와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부 그리고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간략한 상륜부로 구성된

팔각원당형의 사라탑으로 높이는 3.5m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사리탑은 고려말기~초선초기의 승탑에서 유행한 형식으로 탑신의 몸체가 공 모양으로 바뀌고 지붕은 처마 끝이 둔중해지며

지붕 위의 경사도 날로 심해지는 경향을 띠는데, 이러한 특징은 조선시대 사리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속리산 법주사의 대표 불상으로 33m의 동양최대 입상 입니다.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연혁


신라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9년(1872)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출조함에 소요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 갔다.

일제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 하에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25동란으로 중단되었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미륵부처님이 완성. 회향되었다.

1986년 류월란 주지스님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이 해체되고 4년 뒤인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다.

기존 조성 시멘트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 한.일 월드컵 행사의 성공 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회향대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이다.

개금방법은 건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3미크론 두께로 연도 금면적 900에 황금 80kg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신심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인력은 총 4500여명이었다.



두산백과-법주사 금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에 대해 좀더 자세한 내용링크입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1025&cid=40942&categoryId=31543



금동미륵대불 아래에는 사람이 내려갈 수 있는 지하공간이 있습니다.





수많은 불상들이 있는데,

개개인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불공을 드리는 불상입니다.

현재 잘 살아가고 있는 분들의 이름도있고,

돌아가신 분들의 평안한 안식을 위한 불상들도 있었습니다.





미륵보살이 지하의 중앙에 있습니다.





밖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팔상전입니다.




보은 법주사 팔상전

국보 제55호


신라 진흥와 14년(553)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려 조선 인조 4년(1626)에 다시 지어졌는데

조선의 승병장인 사명대사가 주관하였다.

이후 1968년에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상전은 5층 목조탑 건축으로 한국 목조탑의 유일한 실례가 된 중요한 건축물로

내부에 석가여래의 일생을 8장면의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가 모셔져 있어 팔상전이라고 부르게 된 듯 하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3층과 4층은 정면과 측면 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의 정방형으로 되어 있다.

처마를 장식하는 공포양식은 1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짠 주심포식이고 5층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식이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보 제5호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가 3.3m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사자 조각이 올려져 있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석등의 구조는 8각의 지대석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으며

다른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특징이다.









보은 법주사 사천왕석등

보물 제15호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혜공왕(765~780) 대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다시 고쳐 지을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3.9m에 이르는 대형석등으로 화서석은 8각으로 4면에 창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고,

지붕돌 정상에는 보주를 받치고 있는 받침이 남아있다.

사천왕이란 불교에서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동쪽의 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북쪽의 다문천왕을 뜻한다.






법주사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건물이

대웅보전입니다.

우리나라 3대불전중 하나로 여겨지는 대규모건물입니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왕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 18,590,000(5,623,475평)를 말한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왕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속리산 일원은 대한 8경중의 하나로 제2금강 또는 소금강으로 불리는데 4계절의 변화에 따른 경치와 기암, 기석은 절경을 이루고 있고,

대소 사찰이 곳곳에 있어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속리산의 대표사찰인 법주사는 553년 의신조사가 서역에서 불경을 가져와 산세험준함을 보고 큰 절을 세워 법주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혜공광 12년(776)에 진표율사가 대규모로 중창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거치며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전소되었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사명대사 및 벽암대사에 의해 다시 중건되고 보수 증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국내 유일의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석련지(국보 제46호),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등 국보 3점, 보물 12점, 천연기념물 1점, 도지정문화재 25점이 소장되어 있다.

속리산 법주사일원은 1966년 사적 및 명승 제4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속리산은 명승으로,

법주사 주변지역은 사적으로 변경지정 되었으며 산중에는 복천암, 탈골암 등 11개소의 전통사찰이 산재하고 있다.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고쳐지었으나

임진왜란시 불타 버린후 인조 2년(1624)에 벽암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적이 402.80㎡, 높이가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이 건물과 같은 수법의 건물로 금산사 미륵전이 있다.

내부에는 높이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보물 1360호 보은 법주사 소로비로자나삼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대웅보전 올라가는 계단의 양끝에는 원숭이 상이 있습니다.




대웅보전안의 소로비로자나삼불좌상

사진으로는 안 커보이는 데, 실제로 봤을때는 큰 불상이었습니다.





대웅보전 옆쪽에서 멀리 속리산의 능선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보물 제1417호


보살상은 전체높이 213cm 규모로 크게 신체,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가로 네모반듯한 모야으이 받침돌을 그 위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몸통을 세워 고정시켰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되었다.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 옷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시기인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이 건물은 절을 지키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는 문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지붕집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세웠으며, 혜공왕 12년(776)에 중창하고, 조선 인조 2년(1624)과 고종 34년(1897), 1972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이 때에 사천왕상도 다시 교쳤다.

사천왕상은 사방을 지켜주며, 국가를 수호하는 네신다.

수미산 사천왕에 머무는데, 동방의 지국천왕, 남방의 증장천왕, 서방의 광목천왕, 북방의 다문천왕을 말한다.

위로는 제석천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을 지배하면서 불폅을 믿고자 하는 중생을 수호한다고 한다.








사천왕들의 발맡에 인간과 도깨비들이 인상적입니다.






보은 법주사 철솥

보물 제1413호


철솥은 법주사 공양간 근처에 있던 것으로 규모는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cm에 이르는 20톤에 달한다.

큰 사발형상을 하고 있는 이 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로 법주사에 전하여 오는 말로는 법주사가 한창 번성하여 3,000 승도가 운집하여 있을 때 장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없어 제조연대, 제작자 및 제조방법등을 알 수 없지만,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속리산 법주사는 넓은 면적에 볼것이 많은 곳이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잘 보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