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북콘서트(대전지족아이쿱생협대전센터FEEL통3층)

2015. 4. 11. 16:16일상다반사/축제.행사

20150411


20150411 세월호북콘서트(대전지족아이쿱생협대전센터FEEL통3층) - http://blog.daum.net/chulinbone/4524<현재게시물>

20150411 [동영상][공연] 세월호북콘서트 여는공연-이내. 닫는공연-최은하  - http://blog.daum.net/chulinbone/4525





세월호의 아픈 일이 있고, 1주년이 되어가네요.

오늘 작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대전 지족동의 아이쿱대전센터에서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모시고,

세월호 관련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했습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책 제목이자 염원이 담긴 말이었던 아픈기억의 단어들입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2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세월호를 기록하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북 토크 콘서트가 시작 합니다.


오후 4시16분...






여는 공연은 이내가 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후 조용히 동네가수로 활동하던 뮤지션들이 조금씩 소리를 내어주고 있어서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월호 유가족분들과 초청받아 함께 한 분들의

책내용중 공유하고 싶은 글들을 낭독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착한 바보들아

항상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했던 착한 아이들아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고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누가 이쁜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니

학교라는.. 통제라는 안에서 이미 벽은 기우는데

누가 너의 판단을 주저하게 만들었니

어른들의 말씀, 선생님의 말씀

시키는 대로 따르면 괜찮을 거라고

어른들을 믿고 마지막까지 침착하던 네 모습

눈물이 무거워 고개를 떨구는구나...







가족들이 거리로 나왔다. 서명을 받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6월 초에 이미 서명에 참여한 사람이 백만명을 넘어셨으나,

그 정도로 부족하다는 것을, 설마설마 하면서도 하루하루 직면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죽은 이유를 알려달라는 소망이 이다지도 어려운 애원이 되어야 하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함께 울어 주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

우는 것밖에 모르냐며 짓밟으려 드는 힘이 있을을 알아버렸으므로.






전국을 돌며 서명 캠페인을 벌이다가 서울로 온 7월 12일,

가족들은 직접 집회를 주최해 시민들을 모았다.

같은 날, 국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단식을 시작한 14일부터는 광화문 광장에도 가족들이 자리를 잡았다.

15일에는 국회를 향한 특별법 청원 행진이 있었다.

가족들은 350만 1266명의 서명을 일일이 확인하여 416개의 상자에 나눠 담았다.

상자를 함께 든 시민과 가족이 국회로 들어설 때에는, 이제 서로 머뭇거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모진 유언비어가 카카오톡 메시지로 돌기 시작했다.

'특별법은 보상을 더 받으려는 욕심일 뿐' 이라는 내용의 이간질이었다.

음지에서만 도는 것 같았던 유언비어가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 위원장을 맡았던 국회위원의 페이스북에도 버젓이 올랐다.

노골적인 음해가 어느새 공식적인 주장이 되었다.

참사 후 100일이 되어가는데도 국회는 꿈쩍을 안 했다.






찢어지는 마음과 몸을 추슬러, 가족들은 안산에서 서울까지 걷기로 했다.

비는 쏟아졌지만 눈물은 쏟아지지 않았다.

이제 싸워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빗물에 숨은 눈물을 쏟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 세상이 잔혹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100일에서 하루가 지난 7월 25일 가족들이 공개한 '국정원 지적사항' 문건을 통해 세월호의 실소유주가 국정원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세상은 동요하지 않았다.







87년 6월항쟁 때 나도 거리에 있었어요. 그때 참 굉장했죠.

세상이 완전히 바뀔 줄 알았어요.

'이제 다 됐다' 고 생각했죠.

88년에 대학 졸업하고 안산 내려와서 철강회사에 들어갔어요.

산업재해로 전신화상을 입고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이곳에서 다영이 엄마 만나서 결혼도 했고 아이도 셋 낳고 살았어요.

세상의 모순에 맞서 싸우기에는 먹고 살기도 빠듯하고 애들 키우기도 바빴죠.

한편으로는 동네사람들하고 어울려 살면서 같이 아이들 키우고 소주 한잔씩 해가면서 참 재밌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1997년에는 IMF 터져서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고,

2009년 제2금융위기 때는 내가 운영하던 회사가 망해서 완전히 폐허가 됐어요.

가족만은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일어섰어요.

주간, 야간 다 뛰면서 일했어요.

열심히 살았어요.

5년 정도 흘러서 이제는 그나마 소박하게 일상생활 할 수 있게 되니까 우리 딸이 희생돼서 진실규명하라고 이렇게 다니고 있어요.

이 사회는 소신을 지키면서 살기도 힘들지만 먹고 사는 것도 힘들고, 가족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더 힘든 곳이에요.






돌이켜보면 내 삶은 우리 현대사의 급류에 휩쓸려왔고,

그 끝에서 참사의 당사자가 되어 이렇게 길거리에 앉아 있어요.

87년 6월항쟁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때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게 없을 수 있을까 싶어요.

오히려 더 나빠진 거 같아요.

사회의 모순은 더 고착되고 견고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허울만 좋은 민주주의에 국민들이 완전히 속았어요.

참담하죠. 내 딸을 잃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우리가 꼭 진실을 밝힐 거에요.

이 문제를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30년 후에 나같은 사람이 또 가족을 잃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겠어요?







매일 아침이며 제훈이랑 제영이 깨우는 소리, 설거지 소리, 찌개 끓는 소리가 들리는 집이었어요.

근데 이제 애가 움직이는 소리, 옴마가 말하는 소리, 그런 아침을 깨우는 소리들이 없어요.

전에는 집에 있을 때 음악을 거의 하루 종일 틀어놓고 있었거든요.

이제 음악을 들으면 힘들게 간 우리 아들 생각이 먼저 나요.







(...)처음에는 큰 애에 대한 슬픔이 너무 커서 분향소에서도 큰애밖에 안보였어요.

다른 아이들은 볼 엄두가 안 나는 거에요.

분향소에 가면 무게감이 굉장히 크잖아요.

제가 버텨내질 모사겠는 거에요.

내 아들을 잃은 마음이 커서 아들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아들을 두고 미사 드리고 했어요.

어느 날 기도하는데 갑자기 내 아들뿐 아니라 삼백명 넘는 다른 영혼들도 느껴지는 거에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겠구나.' 제가 다른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들에도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날 밤에 꿈을 꿨는데 사람들이 즐거운 모습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꿈이었어요.







책을 썼던 작가분과 세월호 유가족인

창현이 엄마, 창현이 아빠

2년동안 해고노동자로 싸우고 있는 패널한분을 모셔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행사가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리했습니다.








책 내용과 세월호 관련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1주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정부의 무능인지, 고의적인 외면인지..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삭발까지 해가며 진실을 밝혀달라는 유가족에 대한 뉴스를 봤었는데,

그때 창현 어머니도 삭발을 했었습니다.


이땅에 있는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라고 말을 하는데,

들어주지 않은 정부의 답답함이 더욱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편지 낭독도 있었고,








작은화분과 편지를 전달하는 시간도 갖었습니다.


다시는 이땅에 이런 일이 있으면 않된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그것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날아가는 세상이 어이없지만,

싸워 나가는 분들이 더욱 힘 내주면 좋겠습니다.






관객들의 질문에 대한 답 하는 시간도 있었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무거운 마음이 함께 했습니다.




오늘 이자리에 2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에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세월호는 저기 있는 누군가의 아이들이 아닌

우리 국민들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세월호특별법

정부는 국회는, 지금 통과시키려는 법안은..

반쪽도 되지 않은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범위의 법안이라

세월호 유가족들이 반발하고 싸우고 있는것입니다.


지금 이대로 통과가 되면, 그동안 조사한 결과내에서 재검토후 마무리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절대 않된다고 제대로 다시 조사할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의미없는 법이 되면,

제 2의 세월호사건이 발생했을때, 또 다시 아픔이 반복되는 상황이 생길 것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정치권의 사람들 왜? 특별법을 반쪽짜리로 축소하려할까요?

도대체 왜?

무엇이 두려워서...








마지막쯤..

닫는공연으로 소프라노 최은하님이 노래를 불러주셨습니다.






처음과 끝의 안내를 했던 관계자분







오늘 북토크콘서트의 배경 벽을 그렸던 청소년들과

창현이 엄마, 아빠의 잠시 함께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희생된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그 아픔을 함께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체사진 한장 남겼습니다.

저도 같이 찍히느라 준비전 사진만 담았습니다.


이런 아픔으로 인한 이런 모임이 없어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가슴 아픈 저녁이 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