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광장 지하전시실(세종이야기.충무공이야기)

2013. 11. 21. 19:30지구별여행이야기/서울특별시

20131121


 

서울 광화문광장 지하전시실(세종이야기.충무공이야기) - http://blog.daum.net/chulinbone/2800<현재게시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동상.이순신장군동상.해치마당 - http://blog.daum.net/chulinbone/2801

 

본 게시물은 약 100 장으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서울을 여러번 갔지만, 광화문광장에는 처음 가보았는데,

광화문광장 지하에서 생각지 못한 자부심을 얻고, 알고는 있지만, 모자란 부분까지 채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종대왕님 동상 뒤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출입구가 있어서 호기심에 내려갔는데..

 

 

그곳에는 세종이야기 라는 글이 있었고,

화살표가 있었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니

세종대왕님의 업적, 성품...

그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넓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마주한것은

벽면에 스크린이 세로로 설치되어있었는데,

여러가지 이야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세종대왕님의 명으로 대마도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여러가지 과학, 음악에 필요한 장비나, 악기들에 대한 이야기

 

 

 

 

 

 

 

한글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략하게 소개되었습니다.

 

 

 

 

 

 

 

 

반대쪽 벽은 대리석에 세종대왕님의 업적에 대한 것중 한글과 과학에 기여한 이야기들이 음각되어 있네요.

 

 

 

 

 

 

 

중앙홀 입니다.

지하 전시실 공간이 아주 크네요.

 

 

 

 

 

 

 

 

 

 

 

한글이 과학적으로 우수한 글자로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는 나라에서는 한글을 적용해서 자기들만의 글자를 만드는 일도 가능합니다.

 

 

 

 

 

 

신기전

 

 

 

 

 

 

 

 

 

 

 

 

 

세종의 업적

 

 

 

 

 

 

편경

단단한 경석으로 만들어 돌의 두께에 따라 음정이 결정되는 12율 4청성의 아악기로 음색이 청아한 것이 특색이다.

1116년(고려 예종 11)에 중국에서 처음 들어와 1427년(세종 9)에 세종이 박연에게 명하여 개량한 것이며 지금도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등에 사용되고 있다.

 

 

 

 

 

 

 

대간의

1432년(세종 14)에 만들어진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천문 관측기구이다.

처음엔 목재로 만들어졌으나 1438년(세종 20)에 청동으로 제작하여 경회루 북쪽에 있는 간의대 위에 설치하여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하고 정밀한 시간을 측정하는데 쓰였다.

각도기와 비슷한 구조를 지녔다.

 

 

 

 

 

 

규포

1437년(세종 19)에 제작된 천문의기로 하늘의 현상과 별들의 운행을 관측하여 일년의 길이가 정확히 몇 날인가와 24절기를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이다.

수직으로 세운 막대표의 그림자 길이를 기준으로 동지, 하지, 춘분, 추분이라 하고 나머지 20개 절기를 그 사이에 약 15일 간격으로 배열하였다.

 

 

 

 

 

 

편종

본래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악기로 한국에는 1116년(고령 예종 11)에 송나라에서 들어왔으며 그 후 계속 수입해 써오다가 조선 세종 때부터 주종소를 두고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다.

각퇴로 종 아래 정면에 있는 수를 쳐서 소리를 내는데 때리는 강도에 따라 음색이 달라지며, 음색은 웅장하고 날카로운 금속성을 띤다.

 

 

 

 

 

 

일성정시의

세종 19년(1437)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천, 장영실이 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 고안하여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시간 측정기기이다.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는 주야간 겸용 시계로 해시계의 원리와 항성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규칙적으로 돈다는 별시계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수표

1441년(세종 23)에서 1442년에 걸쳐 제작하여 서울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한 하천 수위측정계이다.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여 정확한 강우량을 측정할 목적으로 발명된 세계 최초의 하천 유량 측정계이다.

높이는 3m 정도로 1척(=21.5cm)부터 10척까지 눈금이 새겨져 있으며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각 3척, 6척, 9척 눈금에는 지름이 8cm 정도 되는 구멍을 뚫어 물 높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혼상

1437년(세종 19)에 제작된 혼상은 오늘날 천구의와 같이 하늘의 별자리를 적도와 황도 좌표의 각도로 둥근 구면 위에 표기하여 별자리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한 천문기기이다.

하룻밤 동안 별들의 운행을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들어 밤의 시간과 절기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었다.

 

 

 

 

 

 

적도의

조선후기, 남병철이 세종시대로부터 변화.발전해 온 혼천의와 간의를 연구한 끝에 가장 손쉽고, 편리하게 관측할 수 있도록 고안한 천체 관측기구이다.

천체망원경을 장치하는 방식 중 하나로, 망원경의 가대가 적도 좌표에 의한 적경과 적위의 두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축의 주위를 회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적도의라 부른다.

 

 

 

 

 

 

구포

조선 후기에 사용된 것으로 대완구와 같은 형태의 화포이며, 비격진천뢰와 같은 형태의 포탄을 발사한다.

포신이 목제 직사각형포가 위에 고정되어 있다.

 

 

 

 

 

 

신기전

1448년(세종 30)에 만들어진 조선 시대의 로켓 추진 화살로 세계 최초로 발명된 다연장 로켓병기이다.

신기전은 고려시대 최무선이 발명한 로켓 병기인 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기도설'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비장의 무기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신기전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대신기전, 산화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으로 나뉜다.

 

 

 

 

 

 

황자포

조선시대 초.중기에 사용된 대형화포중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화포로 조란탄 40개와 피령차중전 1개를 쏘았고, 사정거리는 최대 1,100m이다.

 

 

 

 

 

 

 

 

 

천자포

조선 시대 화포 중 가장 큰 대형 화포이다.

육.해전에서 공격용과 방어용으로 널리 활용된 중화기로 처음 만들었을 때는 대장군전을 발사하였지만, 1425년(세종 7)경부터 철탄자가 개발되면서 병용되었다.

 

 

 

 

 

 

 

해시계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볼 수 있고,

안내하는 곳에서는 5개국의 언어로 안내서가 있습니다.

 

한국어, 중국어,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한쪽에는 세종대왕님의 이야기가 있고,

반대쪽에는 이순신장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충무공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조선 시대 작전 신호

조선 시대의 전쟁은 다양한 신호로 전개되었다.

신호는 크게 청각을 이용한 것과 시각을 이용한 것으로 구분된다.

청각 신호에는 포, 북, 징, 괭과리 등이 이용되었고 시각신호에는 연기와 불을 이용한 봉수와 전쟁터에서 명령을 내리고 받는 깃발 등이 이용되었다.

이순신장군은 주변 상황에 따라 제약이 있는 청각신호와 다양한 의사 표현이 어려운 시간신호의 단점을 보완한 작전신호를 사용하였다.

조선 수군들에게 익숙한 음양오행론에 바탕을 두어 청색은 동쪽, 적색은 남쪽, 백색은 서쪽, 흑색은 북쪽, 황색은 가운데를 의미하는 깃발을 사용했다.

진법뿐만이 아니라 작전신호에서도 그의 뛰어난 창의력이 발휘도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속의 거북선

 

 

 

이순신 종가에 소장된 거북선

거북선의 등에 장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등판의 구조가 특이하고, 용의 머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그림에는 거북선을 찬양한시(귀선송)가 적혀 있는데 그 내용 속에는 거북선의 치수도 함께 기록 되어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제작한 거북선의 치수와 구조를 추론할 수 있는 자료이다.

 

 

 

 

 

 

 

병풍에 그려진 거북선

조선후기 <수군조련도>, <해진도> 등에 나타난 거북선 그림으로 기본적인 특징만이 묘사되었다.

용머리에서는 유황연기가 나오고 있고, 등판에는 장대와 같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어 19세기 이후의 거북선 형태를 보여준다.

그 외 거북선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는 김수항의 <장계, 1687년 1월>, 박문수의 <장계, 1751년 2월>, <호좌수영지>, <여암전서> 와, 미국에서 공개된 <거북선>그림등이 있다.

 

 

 

 

 

 

 

<이충무공전서>에 그려진 거북선

임진왜란 후 200여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년)에 정조의 명에 따라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그려진 거북선이다.

여기에 '전라좌수영 거북선'과 '통제영 거북선' 그림이 실려있다.

용 머리가 거북 머리로 바뀐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의 모양과는 약간 달라진 모습이다.

 

 

 

 

 

 

 

 

<간재집>에 그려진 거북선

이덕홍의 문집 <간재집>에 나타난 거북선이다.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려 귀갑선의 제작을 건의 하였다.

귀갑선의 구조는 등에 창검을 붙이고 머리에는 쇠뇌를 매복하고 중간 부분에 판옥을 지어 사수를 그 속에 둔 형태이다.

 

 

 

 

 

 

 

 

이순신의 리더쉽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을 도운 인물들

 

 

 

정탁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재를 식별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유했던 그는 이순신 장군을 비로하여 곽재우, 김덕령 등 명장들을 천거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조정의 명을 받들지 않았다 하여 옥에 갇혔을 때, 구구절절 명문으로 이어진 '신구차(최가 없음을 알려 구원하다는 뜻의 상소)를 선조에게 올려 적극 구명하였다.

 

 

 

 

 

 

 

 

이원익

선조 때 대동법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고, 불합리한 조세 제도를 시정했던 문신이다.

이순신 장군의 애민사상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지지자들 중에서도 그를 가장 열렬하게 아낀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중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을 때에도 이순신을 변호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옥에 갇히게 되자 <장계>를 올려 그의 무고를 고하였는데 결국 뜻이 통하지 않자 "이 사람이 죄를 받으니 국사는 다 틀렸다"라며 탄식하였다.

 

 

 

 

 

 

 

 

류성룡

임진왜란 당시의 영의정으로 문신 겸 학자였다.

어린시절부터 이순신 장군과 우정을 쌓으며 일찍이 그의 올곧은 성품과 실력을 알아보았다.

임진왜잔 발발 1년 전, 이순신장군을 수군 지휘관에 천거하였는데, 이는 종6품인 정읍 현감에서 정3품인 전라 좌수사로 승진하는 무려 7계급특진이라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또한 전략을 수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병법서를 보내 주는 등 이순신장군에게 큰 힘이 되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기록한 저서 <징비록>에서 이순신 장군이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였다.

 

 

 

 

 

 

 

나대용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년) 장차 왜구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국방에 대한 대비책을 상세히 보고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그에게 뛰어난 재주가 있음을 알고 조선담당 장교로 임명하여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 후에도 새 전투함인 창선을 창안하여 건조하였다.

남해 현령으로 있을 때에는 쾌속정인 해추선을 발명하기도 하였다.

 

 

 

 

 

 

 

이봉수

기예를 배우고 제갈 무후의 포진법을 연습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을 찾아갔다.

그가 생각해둔 방어전략을 말하자 이순신장군은 그에게 군무를 맡겼다.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의 승리 요인 중 하나는 바로 화약병기였다.

전쟁 초기 도성이 함락당하자 도성 창고에 보관 중이던 화약이 모두 불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염초자취술에 능한 이봉수가 화약 제조를 하여 수군은 화각을 각 진포에 공급할 수 있었다.

 

 

 

 

 

 

 

정사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제들과 함께 집의 종들을 거느리고 군량미 천 석을 내어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종군하였다.

조선의 화포는 대형총통은 우세하였지만, 개인 휴대 무기인 승자총통은 일본의 조총에 대항하기에 성능이 크게 떨어졌다.

이에 정사준이 묘법을 생각해 내어 정철총통을 고안했다.

정사준은 정철총통을 만든 공로로 포상을 받았고 이순신 장군은 그의 공로를 <임진창초>에도 기록하였다.

 

 

 

 

 

 

 

 

세계가 존경하는 인품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1862~1948)

영국의 해군 제독. 그의 저서 <바다가 일본 정치 역사에서 미친영향> 중에서

"이순신은 서양학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는 능력과 해군 전술의 비상한 기술과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 원칙을 바탕으로 한 놀라운 리더십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넬슨과 견줄 수 있는 해군 제독이 있다는 사실은 시인하기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 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죠지 엠. 헤거먼

미 해군 대령. 1957년 미 해군 잡지에 기고한 <거북선의 왕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한국의 영웅은 이렇게 장렬한 죽음으로 생을 끝마쳤다.

임금이 충무공이라는 가장 명예로운 시호를 수여한 이 사람이야말로 300년간 일본의 극동침략을 저지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1887~1976)

영국군 총사령관. 그의 저서 <전쟁의 역사> 중에서.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장군 이순신은 전략가이자 전술가였고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제작에도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중략) 일본 해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장군 이순신의 철갑 전투함(거북선)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도고 헤이하치로(1848~1934)

일본의 해군제독.

"칭찬을 받아서 고마우나 나로서 말한다면 넬슨은 군신은 아니다.

진정으로 군신의 칭호를 받을 만한 제독이 있다면 그것은 이순신일 것이다."

 

 

 

 

 

 

사토 데쓰타로(1866~1942)

일본 제국의 해군 중장. 1926년<조선지방행정> 제6권 2월호 중에서.

"해군 장군인 내가 평생을 두고 경모하는 바다의 장수로 네델란드의 로이테르와 조선의 이순신이 있다.

그 중에서 갑과 을을 정하라 한다면 서슴지 않고 이순신을 먼저 추천할 것이다.

영국의 넬슨이 세계적인 명장으로 명성이 높은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 인격에 있어서나 창의성에 있어서는 도저히 이순신의 짝이 될 수 없다."

 

 

 

 

 

 

진린(1543~1607)

정유재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

 

 

 

 

 

 

숙종(1661~1720)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마는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정조(1752~1800)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 당나라 사직을안정시킨 이성과 한나라 왕실을 회복시킨 제갈량을 합한 분이 충무공이다.

 

 

 

 

 

 

 

이항복(1556~1618)

이순신은 화평하고 어진 덕을 지녔으며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재능, 그리고 상과 벌을 곧바로 주는 용기가 있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런 정도라면 백세에 이름을 날릴 사람이라 하겠지만, 이순신에게는 그저 당연히 해야할 하찮은 일이었다.

 

 

이식(1584~1647)

옛날의 명장이나 어진 장수 가운데 백 년에 한둘밖에 나지 못하는 그 어떤 인물이라도 이분을 넘어설 이는 없을 것이다.

 

 

이덕형(1561~1613)

첩보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를 포함해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7년간의 난중일기

 

 

 

 

 

 

이순신장군님이 임진왜란중 썼던 난중일기가

터치스크린을 통해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테마별로 잘 구분 되어 있어 여러가지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목차

올곧은 성품

전쟁준비

이순신의 용기와 희생

이순신의 꿈

영의정 류성룡과의 교유

가족에 대한 사랑

병사, 백성에 대한 사랑

임금(나라)에 대한  충성

 

 

 

 

 

 

 

 

 

 

 

 

 

 

 

 

 

 

 

 

 

 

 

 

 

 

 

 

 

 

 

승리의 해전술

 

 

 

 

 

 

 

 

 

 

 

 

옥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한산대첩

 

 

 

 

 

 

 

부산포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모형배들과

 

 

 

스크린을 통한 해전에 대한 이야기도 영상으로 볼 수 있네요.

 

 

 

 

 

 

 

 

 

 

 

 

 

 

 

 

 

 

 

복도쪽에 한글쓰는 체험장도 있습니다.

 

 

 

 

 

 

 

4D체험관이 있는데 무료입니다.

명량해전에 대한 내용이 상영되는데 약 8분정도 상영하네요.

 

 

 

 

 

 

 

좌석이 2개씩 떨어져 있고,

화면에 따라 움직이고 바람이 불고 물도 뿜어냅니다.

좀 어설픈 4D이지만, 볼만해요.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명량해전에 대한 사영합니다.

첫화면만 사진 찍고 봤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거북선이 실물보다는 작지만 사람이 들어 갈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네요.

 

 

 

 

 

 

 

실제 사람보다는 많이 작은 크기의 인형들이 설정을 하고 있는데,

거북선의 내부를 대충 알 수 있네요.

 

 

 

 

 

 

 

임진왜란 당시, 3국의 전투함 비교

 

 

 

 

아래는 체험관입니다.

게임처럼 해놓았네요.

 

노젓는 시뮬레이션

 

 

 

 

 

 

현자총통, 소승자총통을 쏘면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해놓은 코너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