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전형무소(대전교도소자리)-담장.망루.우물.항일역사(중구.중촌동)

2021. 1. 19. 01:26지구별여행이야기/대전광역시

20210117

 

20160405 대전교도소망루.대전감옥소망루(중촌동) - http://blog.daum.net/chulinbone/5409

20210117 구.대전형무소(대전교도소자리)-담장.망루.우물.항일역사(중구.중촌동) - http://blog.daum.net/chulinbone/8866

 

대전 중촌동

예전에는 비행기가 전시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비행기들이 사라졌네요.

한국자유총연맹이라는 단체의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 보이는 곳입니다.

이곳은 예전에 대전형무소가 있던 자리로 역사적으로 여러 의미가 있고, 대전형무소 일 때의

흔적들이 여러 가지 남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생각나는 가벼운 산책을 해봤습니다.

대전형무소 자리에 주차장이 있고, 주변으로 다양한 역사적 가치의 구조물들이 있습니다.

 

 

마트가 있는 건물 쪽으로 [반공애국지사영령추모탑]이 있습니다.

그 뒤로 우물이 하나 있는데, 길에서 걷다가 보여서 우물부터 갔습니다.

 

 

반공애국지사영령추모탑 뒤에 있는 우물입니다.

 

 

구 대전형무소에서 수도시설이 없어서, 식수로 사용한 4개의 우물 중 남아있는 1개의 우물입니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수감자들이 학살당한 장소였고, 취사장 우물에서 17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고 합니다.

 

 

우물에는 유리로 덮여있어서 내부가 보이는데, 지금도 물이 고여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참상이라지만,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기라도 잊지 말아야 할 역사입니다.

 

 

.

.

.

약 60년 이상 수령의 왕버들나무

1984년 지금의 구 대전교도소에서 유성으로 교도소가 이사 갈 때,

교도소 내 연못가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심었습니다.

 

 

반공애국지사영령추모탑

 

6.25전쟁으로 인한 공산당의 만행으로 희생된 영령이 잠들어 있는 현장에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반공애국지사영령추모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주차장.

예전에 대전형무소 자리입니다.

 

 

주차장에서 아파트 쪽으로 있는 일제 강점기의 대전형무소에 대한 내용과

항일운동가 및 역사적 사건들 같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적혀있는 벽이 서있습니다.

지난 역사지만, 잊지 말자고 만들어 놓아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대전 형무소(1919~1945)

충남 대전면 중촌리(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에 장형기감으로 구상되었던 대전감옥은 조선총독부령 제86호(1919년 5월 8일)에 그 설치가 고시되었고, 같은 해 10월 19일에 개소되었다.

이후 대전감옥은 조선총독부령 제72호에 의해 1923년 5월 5일에 대전형무소로 개칭되었고, 해방 이후 형행법의 1차 개정(법률 858호 1961, 12. 23)에 따라 대전교도소로 다시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전감옥은 총면적 34,000평, 구내면적 14,000평의 규모로 계획되었고 1918년부터 설계가 착수되어 1938년 여감방 신축 계획까지 약 20여년간 청사 1동, 중앙간수소 1동, 감방 8동(잡거감 3, 독방 2, 병감 1, 구치감 1, 여감 1), 정문 1동, 공장 4동, 취사장 등의 건물들이 일제에 의해 설계되었고 또 대부분이 조성되었다.

 

교도소 시설 내에서는 창씨개명 및 신사참배 등을 통한 황국신민화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인 간수는 사상범(독립운동가 및 애국지사)이  수용되어 있는 1감과 5감에는 배치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접촉조차 시키지 않았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대전형무소는 조선독립을 위해 힘쓴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나라를 잃은 비통함이 담겨져 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항일운동가

대전감옥은 처음부터 장기수와 특수범죄 수형자를 수용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이후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특히 장기 형량을 받아 서대문형무소나 여타의 감옥에서 이감되어 온 경우가 많았다.

 

도산 안창호(1879.11. 9 - 1938. 3.10)

평양 태생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독립협회, 인민공동회, 대한인공립협회 및 흥사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았으며, 1930년 1월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어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대전형무소로 이송,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1935년 2월 10일 가출옥 했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 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었으나 이듬해 3월 10일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몽양 어운형(1885 - 1947. 7.19)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설립을 시작으로 1918년 상해고려민친목회와 신한청년당 조직을 주도하였으며, 1919년 재일유학생의 2.8독립 선언과 3.1운동 등에 관여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9월 26일에 만기 4개월을 앞두고 대전형무소에서 가석방 되었다. 이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1933), 조선건국 동맹위원장(1944),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1945)등의 중책을 맡았으며, 김규식.김창숙 등과 함께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1947년 7월 19일 테러로 서거하였다.

 

심산 김창숙(1879. 7.10 - 1962. 5.10)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었던 김창숙은 1905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참오적소'를 올리고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했다. 이후 파리장서사건(제1차 유림단사건), 제2차 유림단사건 등을 주도하였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발행하였으며, 박은식 등과 '사민일보'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1927년 상해에서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복역 중 옥중 투쟁과 고문에 의해 두 다리가 마비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해방 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을 벌였으며,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사진으로 만나는 대전형무소

대전감옥 신축배치도(1918년 경) / 대전형무소(1920년대 추정) / 대전형무소(1932년) / 수형기록카드

 

 

1960~1980년대의 대전교도소

시대적배경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협상으로 종결되면서 대전형무소는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소실된 문서를 재작성한다. 1960년대 접어들면서 업무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대전형무소는 1960년 5월 2일 행정쇄신을 위하여 형무소장급의 인사를 단행한다. 민주화 운동 시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대전형무소는 대외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먼저 형행법의 1차 개정(법률 858호 1961.12.23)으로 명칭이 형무소에서 교도소로 변경된다. 이 시기의 대전교도소 수용자는 일반수용자, 미결수용자 이송, 소년수형자, 누범자 이입, 좌익 수용사범, 외국인 수용의 형태로 구분되어 관리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 속에 전국 13개소에 분산.수용되어 있는 563명의 미전향 좌익수형자들이 이감되면서 대전교도소는 좌익수형자 전담수용소의 역할을 담당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있었던 대전교도소는 1979년 1월부터 충남 대전시 중구 대정동 36번지에 수용거실, 작업장, 청사, 후생시설, 경기교도대 청사 등 총 연건평 16,394평의 현대식 중구금 교정시설을 조성한 뒤 1984년 3월 20일 이전하게 된다.

 

 

인물 및 사건

한국전쟁 당시의 대전교도소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자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한국정부에 의한 희생자(산내 곤룡골)

6.25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여순사건 관련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 등이 한국정부의 지시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에 좌익계 인물들을 전향시켜 별도로 보호, 관리하려는 취지로 결성된 단체로, 흔히 보도연맹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체포 또는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의 심사와 분류에 의해 'A, B, C' 또는 '갑, 을, 병'으로 나뉘어져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A'와 '갑'등급은 대전 인근 산내에서 대전형무소 일부 수용자들과 함께 모두 학살되었으며 그 수가 수 천에 이른다고 한다.

 

북한군에 의한 희생자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군은 급히 퇴각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대전교화소(대전형무소), 충남도정치보위부(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전내무서(대전경찰서) 등지에 수감되어 있었던 정치범(우익인사)들을 대전형무소 내 우물에 생매장을 하거나 대전형무소 후문 북쪽 온상의 밭고랑, 용두산, 도마리, 탄방리 등으로 끌고 가 학살하였으며, 그 희생자가 1557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전형무소 의무과장 안사영

안사영은 공주 영명학원을 수료하고 1917년 세브란스 연합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의 의무감과 신흥중학 산하 산제병원의 원장을 역임한다. 이후 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 등에서 활동한 경력때문에 몇 차례 체포와 투옥을 당하다가 결국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평양에서 2년간의 복역을 하고, 1922년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되돌아간다. 1940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안동병원을 차리고 독립군 치료와 독립군자금 모금에 전념하였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대전형무소 형무의무관으로 임용(1946년)되어 1962년 4월 23일까지 근무하였다.

 

 

항공사진으로 보는 대전형무소

1948 - 일제강점기 대전형무소의 모습 추정

1968 - 광복 후 대전형무소의 신축상황

1983 - 대전교도소 이전 대전형무소의 마지막모습

1985 - 건물들이 사라진 대전형무소 터

 

 

8.15 해방 이후~ 한국전쟁시기의 대전형무소

1945년 광복 이후 열강에 의해 38선을 중심으로 나뉘어져 남쪽은 미국에 의해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전형무소 기록은 일제의 고의적인 문서폐기와 6.25전쟁에 따른 피해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 한국전쟁 직전 대전형무소에는 약 24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여순사건(1948년 10월 발생) 관련자를 포함 약 4,000명의 수용자가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대전에서는 한국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북한군에 의한 우익인사 학살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으며, 산내 곤룡골과 대전교도소 내외 인근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모든 사건들의 공간적 배경에는 항상 대전형무소가 있었다. 대전형무소에서 시작된 대규모 학살사건은 6.25의 비극을 대표하는 사건 중에 하나이며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할 가슴 아픈 사건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발생된 학살 사건은 참여 정부인 2005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북한군에 의한 학살 사건은 2008년, 한국 정부에 의한 학살은 2010년에 진실규명되었다.

 

 

인물 및 사건

해방 이후에도 대전교도소는 정치범 및 사상범을 수감하는 교도소로 이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시국 사범들과 전쟁포로 및 남파공작원들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으며,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보안사 군인들, 경찰 대공라인 소속 경찰관들이 상주하며 전향공작을 펼쳤던 곳으로 다른 교도소보다 악명이 높았다.

 

고암 이응노(1904-1983)

충남 홍성 출신의 화가. 6.25전쟁 때 월북한 아들 관계로 베를린에서 북한 공작원과 만난 것 때문에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67년부터 1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이응노 화백의 옥중 대표작인 밥풀 조각은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윤이상(1917-1995)

경남 산청 출신의 작곡가. 소위 동백림사건이라 불리는 동베를린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복역을 한 후 독일로 돌아가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1971년에는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1972년에 뮌헨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대전교도소 수감 당시에는 악단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신영복(1941-2016)

경남 밀양 출신의 경제학자.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재직 중에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88년에 광복절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고, 출소한 날 수감 생활의 소회와 고뇌를 담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하였다. 수감 중에는 대전교도소 서도반에서 만당 성주표 선생과 정향 조병호 선생에게 정식 서예를 배웠으며 이후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하였다.

 

 

사진으로 만나는 대전형무소

-6.25 반공애국 희생자 현창비(1961.09.30)

-대전형무소 우물(1950년 9월 말 추정)

-1951 대전시가지 지도

-전쟁포로(대전형무소 기록영상에서)

 

 

지금은 없어진 대전형무소(대전교도소)에 남아있는 담장의 흔적들을 모아두었습니다.

길가쪽에서 발견된 것 같은데, 이곳에 모아서 대전형무소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오래된 역사도 아닌데, 도시가 급격히 개발이 되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버린 역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늦었지만,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보이는 곳에 놓고 잊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다행이다 싶네요.

 

이렇게 과거의 흔적들을 남겨두고 관리하다 보면,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될 거라 생각해봅니다.

 

 

 

 

기억의 터 라는 장소입니다.

 

 

이 글은 신영복 선생의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이부를 발췌해 온 글로

수감당시의 대전교도소의 상황과 신영복 선생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글입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하게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삼십칠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이 글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대전감옥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아내 혼자 다섯 명의 아이를 키우며 고생하는 것에 대해 미안함과 특히 자식을 잘 키우기를

소망하는 아버지의 마음과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큰 사람의 큰 그릇임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혜련!

내가 이 경우에 처한 것을 위하여 근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집안일을 돌아보면

아이들을 교양하는데 수고하는 것으로 낙을

삼으시오. 당신이 만일 수심하는 빛을 띠우고 있으면

집안에 화기가 없어지고 따라서 아이들의 신체발육과

정신발달에 큰 영향을 줄 터이니

내게 관한 모든 것은 아주 없어진 양으로 일소하여

버리고 가정에 유쾌한 공기와

아이들의 활발한 기상을 만들기로 주의하시오.

.

.

중략

.

.

'사랑' 이것이 인생의 밟아나갈 최고 진리입니다.

인생의 모든 행복은 인류간 화평에서 나오고

화평은 사랑에서 나오는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랑이 있는 사회는 화평의 행복을 누립니다.

'사랑'을 최고 진리로 믿고 사랑을 실행하는 사람의

사랑으로 인하여 가정이나 사회에 화평의 행복이 촉진될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사랑을

믿고 사랑을 품고 사랑을 행하는 그 사람 자신의 마음이

비상한 화평 중에 있음으로 남이 헤아리지 못할

무상한 행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즉 내나 당신이 앞에 남아 있는 시간에 우리 몸이

어떤 곳에 어떤 경우에 있던지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화평에 이르도록 '사랑'을 믿고 행합니다...

-1933년 6월 1일(대전감옥에서 써보낸 편지)-

 

 

 

기억의 터에 신윤복 선생과 안창호님의 글이 적혀 있습니다.

 

 

 

지금의 대전교도소 자리에 남아있는 건물들입니다.

예전 교도소와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건물입니다.

큰 건물은 한국자유총연맹이라는 단체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전교도소와 관련된, 지금도 관리 되고 있는 건물이 망루입니다.

선병원이 보이는 곳 앞에 있는데, 모두 7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진의 1개만 남아있습니다.

대전형무소 때부터 대전교도소까지 오면서 시기별로 추가로 망루가 설치되었는데,

사진의 망루는 1971년에 세워진 것으로 국유재산대장에서 확인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때 세워진 망루들은 전부 철거되었습니다.

 

망루는 총 7개가 있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망루는 1개로 1971년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장소라서 쉽게 갈 수 있는데, 이 동네에 오래 살았으면서도

잘 몰랐던, 구 대전형무소(구 대전교도소)에 대해 조금은 공부한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아플 수 있는 과거의 역사를 잃어버리면, 다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에

잊지 말고 기억해서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길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더이상 전쟁이나 이기적인 생각들로 인해 의미 없이 사라져야 할 목숨이 없도록

지금의 평화가 이어져 통일도 이루어지고, 세계 평화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더욱 강하게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