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근대화거리 골목투어 2코스(이상화고택.계산예가.구.제일교회)

2013. 11. 14. 13:20지구별여행이야기/경상남도.북도

대구 근대화거리 골목투어 안내지도 - https://chulinbone.tistory.com/2781

대구 근대화거리 골목투어 2코스(청라언덕.의료선교박물관.선교사스윗즈주택.챔니스주택.동산병원구관현관.블레어주택) - https://chulinbone.tistory.com/2774

대구 근대화거리 골목투어 2코스(3.1만세운동길.제일교회.계산성당) - https://chulinbone.tistory.com/2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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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근대화거리 골목길투어 2코스(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영남대로) - https://chulinbone.tistory.com/2778

대구 근대화거리 골목길투어 2코스(종로진골목.화교소학교.대구화교협회) - https://chulinbone.tistory.com/2779

대구 김광석거리(김광석다시그리기길).방천시장 - https://chulinbone.tistory.com/2780


20131114

 

대구 근대화거리 골목투어 2코스(이상화고택.계산예가.구.제일교회)

 

점심 밥을 먹고 대구 근대화거리 골목투어 2코스를 계속 걷습니다.

이골목, 저골목이 엊갈려 있기는 하지만, 이정표들이 잘 되어 있어 찾아다닐만 합니다.

 

 

 

두사충의 뽕나무 사랑이야기

 

두사충은 명나라 두릉사람인데 시성 두보의 21대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명장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풍수지리참모였다.

임진왜란 이후 두사충장군이 귀화하여 인근 경상감영공원 터에 살다가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오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정착한 곳이 지금의 계산성당 인근지역(계산동)이다.

두사충은 조선의 열악한 의복문제를 해결하고 생활의 안정도 꾀하고자 인근에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고 식솔들에게 길쌈을 권장하여 계산동일대를 두릉 씨 세거지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날 두사충이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다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미모의 아낙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날로 두사충은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늘그막에 상사병이 들다시피 해 날마다 뽕나무에 올라 애태우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미모의 아낙네를 만나 보았다.

그 아낙네는 청상에 홀몸이 되어 수절하고 있던 과부로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터라 쉽게 중매가 되어 두사충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근대문화골목

 

이 거리는 선교사주택~3.1만세운동길~계산성당~이상화.서상돈 고택~성밖골목으로 이어지며,

도심속에서 개화기 근대문화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골목 곳곳에는 선현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옛 정취와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

우리시에서는 아름다운 거리로 지정하여 그 품격을 지키고자 한다.

 

 

 

 

 

 

 

 

 

이상화고택

민족저항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에 비탄에 빠진 우리정서를 언어로 끌어올림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이정표를 세운 민족시인입니다.

 

본 고택은 이상화가 말년(1939~1943)을 보낸 역사적인 장소로 이상화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니 대표적인 시의 제목이 보이네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천

 

 

 

 

 

빼앗긴 들어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고택

 

 

 

 

 

 

 

 

 

 

 

 

 

이상화 고택 바로 옆에는 계산예가 가 있습니다.

 

이곳은 근대문화의 체험관으로

계산동에 있었던 역사적인 일들이나 흔적들을 모아놓은 전시관 같은 곳입니다.

 

 

 

 

 

 

 

 

계산예가에 느린우체통이 있습니다.

건물뒤쪽 벽사이로 보여서 귀찮다고 지나갈 수 있는 곳에 있는데,

편지를 보내면 1년있다가 받을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우체통이 왜, 건물뒤쪽에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느린우체통이 설치된 이후 인기가 있었는데,

일제에 저항을 했던 시인 이상화 고택에 일본 우정국 마크(テ)가 있는 우체통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항의를 받았고, 이를 확인한 대구시에서 철거 이동시킨 것이 건물 뒤쪽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네요.

 

내년쯤 우정국에서 다시 일반우체통을 설치하기로 했다는 것 같습니다.

 

근대화도 좋지만, 사소하다 할 수 있는 것에서 신경을 좀더 썼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생각이드네요.

 

 

 

 

 

 

 

 

 

 

 

 

 

 

계산동의 어제와 오늘

 

 

 

 

 

대한제국 시기

 

 

 

 

 

일제 강점기

 

 

 

 

 

해방과 6.25전쟁

 

 

 

 

 

산업화시기 이후

 

 

 

 

 

행정구역의 변화

 

 

 

 

 

 

서상돈 고택은 바로 앞에 있었는데,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지나쳐왔습니다.

 

서상돈 고택에 적혀있던 글을 남겨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

국채보상운동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찾고자 나랏빚을 갚자는 모금활동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서상돈 선생의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선생의 삶의 터전으로 한국 근대문화를 담고 있는 유서깊은 곳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이렇게 작은 안내판들이 있습니다.

 

 

 

 

저 간판을 지나서 부터 주변이 한약관련 업종의 상점들이 많이 보입니다.

 

 

 

 

 

조금 걷다보니 오래된 교회 건물이 보입니다.

 

 

 

 

 

 

대구 제일교회

 

제일교회가 있는 이 자리는 1898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대구 경북지역 최초의 기독교 교회인 남성정교회를 세운 곳이다.

1908년에는 교세 확장에 따라 전통과 서양 건축양식을 절충한 단층 교회당을 새로 지었다.

그 뒤 1933년에 신도들의 헌금과 중앙교회의 성금으로 벽돌로 교회당을 짓고 제일교회로 이름을 고쳤다.

1936년 5층 높이의 벽돌로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고 앞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오른쪽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서양의 중세사회에 속하는 13~15세기 때 유럽에서 널리 유행한 고딕건축양식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현재는 무언가 하려는지 예배도 드리지 않는 상태로 굳게 철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는 볼 수 없었습니다.